공자가 살던 춘추천국시대엔 사내 아이들은 대개 너댓살부터 공부를 시작하기 마련이었다(당연히 먹고살만한 가정만 해당된다. 당시의 서적이 모두 죽간에 씌여졌다는 걸 기억한다면,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가정 형편으로 겨우 열다섯에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공자는 70이 넘은 아버지와 16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공자가 세 살 무렵에 부가 사망, 어머니 홀로 그를 키웠다).
나이 설흔에 이립했다는 말은, '선다'는 것은 '예'다'(立於禮.또한 '선다'는 것은 '바로 선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알아야 설 수 있다(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그의 말로 알 수 있듯이, 지례(知禮)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선다는 것은 '예를아는 것'을 뜻한다.
불혹은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의 유명한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禮를 알고, '道'(人道)를 터득하고, 德(天道)을 깨달아 '性'(道의 本質)을 아는 단계, 즉 '도'에 이르른 경지를 말함이고, 不動心(맹자)의 단계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오십의 지천명이란 '天命則性 性則理'라는 性理學의 핵심에 다달아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같은 소인배로는 올라가기는 커녕 바라보는 것도 힘든 단계이리라.
나머지 단계에 대해선 내 나이가 그것을 알아듣기엔 '멀었다'고 생각되어 생략하겠다.
공자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나이 이제 지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상은 沒志學하고 不知禮한 단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같다.
<부귀라는 것이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부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해도 얻어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바, 도를 행하고 덕을 쌓겠다> (공자: 사마천/사기열전/삼성출판사/1979년3월10일 제14판/39페이지)
...와 같은 공자의 말씀 자체를 시험해보는 것조차도 해보지 못한 범속한 개인으로 살아왔기에 어쩌면 당연 한 일일지도 모른다.
유학의 많은 가르침이 적어도 '머리'로 이해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마음에 심고, 행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마음에 사욕이 가득하고, 유혹에 흔들리고 소인배처럼 입에 발린 헛놀음에 그것을 이용하려고만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유학에서의 하늘의 참뜻, 즉 性과 理를 아는 것은 종교적 단계까지 올라가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영혼으로, 즉 '心魂'으로 '알아져진 것'(이것이 '득도' 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회심'이자, '중생=거듭남'인 것이다)이라고 나는 이해하기에, 그것은 곧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 것'이 나를 끝없이 충돌질해 실천을 명하기에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사람이 '완전히' 바뀐다)
그런 단계에서 행하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고, 용기가 없는 것이며, 반대로,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그러나, 나이값해야할 그런 단계에서 나이값 <안>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안>한다고 한 것은 '사태'를 곡절하고, 사실을 기망하고, 거짓을 밥먹듯이 일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도성'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사욕(;私利)에 맞닿아있거나 병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행함에 있어 항상 '私利'에만 움직이는 것은 패악한 것이며 자타공멸로 이끄는 행위이다.
소인은 利에 머물기에 항상 그것이라면 표리부동하고, 배신을 밥먹듯이 행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재물'에 관해서만은 일관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도 '이'로 정리되며, 단 하나의 철학(;재물)만을 원근법적으로 펼쳐놓고 거기에 모두를 끼워 맞추기에, 국가와 전 인류에 대해 끝없이 해악을 준다. 이것이 바로 '사욕'에 머문 '나이값 안하는' 단계다.
그 다음의 '병의 단계'는 현재 치료약이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심각하다.
그래서 '요런 환자'들에 대한 대안으로는 정신병원에 수용을 하거나, 드라크르와의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狂人船'에 태워 바다로 보내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물론 도리에 합당치 않는 일이기는 하나, 그 해악으로부터 인류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는 비례원칙으로 천칭에 놓아볼 때 압도적인 기울기로 나타나기에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헌데, 문제는 이런 나이값 안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순'과 '종심'이라는 '형식적'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 라는 것이다.
아, 이분들이 나보다 연장자시고, 화장실에 앉아 본 것도 수천번 이상일 것이고, 밥을 드셨어도 수천 그릇 더 자셨을텐데, '어린 놈'이 그 어찌 '어른'들을 책잡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내 입장에서 볼 때 딸자식같은 어린 소녀의 가슴에 '성추행'을 능가하는 헛소리로 못질을 해대는 수준이라면, 이건 '의도적 노망'이고 정말 '살의에 준하는 명예훼손'으로, 다시는 빛을 볼 수 없도록 국민들의 이름으로 고소하는 게 어떻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기 눈에 맞는 색으로만 걸러내고, 자기 듣기에 좋은 것으로만 듣고(정말 불쌍한 '이순'이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하는(;종심) 단계라면 '노망'이지 '득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이값을 <못>하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거나 능력이 안되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나이값을 <안>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안하는 것이기에 인생을 심각하게 '왜곡해서' 살아온 것이며, 최후까지도 바뀔 가능성은 커녕 그렇게 할 노력조차도 안하는 것이기에 인생 헛 산 것이다.
이런 자들이 심심하면 들먹이는 것 중의 하나가 관중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후반부 구절은 언급하질 않는다. 자기 욕하는 건 알거든.
<곡식 창고가 가득차고 물자가 풍족해지면 비로소 백성은 예절을 알고,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지면 영욕을 비로소 알게 된다. 위에서 절도를 지키면 육친(부모/형제/처자)이 굳게 화목한다. 四維(나라를 다스리는 四大綱. 즉, 禮義廉恥)가 해이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관중;사마천/사기열전/삼성출판사/1979년3월10일 제14판/39페이지)
돈을 벌고 친족끼리만 잘 먹고 '쎄쎄세'하고 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다하고 예의염치를 지켜야 아랫사람에게 본이 되고, 국민들도 기쁘게 흉내내고 좇으려고 할 텐데, 아무런 교훈은 커녕, 허구헌날 국민들을 위협하고, 길가는 아무에게나 침뱉고 힘자랑하는데, 그렇잖아도 창고에 먼지 수북하고 분노가 이글거리는 국민 가슴팎에 대못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이 사십이 넘었으면 언제든지 세상을 뜰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고, 나이 육십이 넘었으면 그렇게 살게 해준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며,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는 게 최소한의 '나이가 준 무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